좋은 글이에요.

[스크랩] 김수환 추기경님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 3

황승면(바실리오) 2009. 3. 2. 02:11


김수환 추기경님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 3
『 동성상업학교 시절(上) 』





신부되기 싫어 꾀병 부리다 진짜 축농증 걸려


대구 성유스티노 신학교(예비과)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동성상업학교에 진학했다.

동성상업학교(현 동성고등학교)는 갑조(甲組)와 을조(乙組)로 편성된 5년 제였는데 갑 조는 일반 상업학교였고, 을 조는 나처럼 신부가 되려는 학생들이 다니는 소신학교였다.

전 원주 교구 장 지 학순 주교(1921~1993), 전 전주 교구 장 김 재덕 주교(1920~1988)가 입학동기다. 지 학순 주교는 도중에 결핵에 걸려 중퇴했다가 몇 년 후에 함남 덕원 신학교로 편입했다. 그 때문에 동기들 가운데 '꼴찌'로 사제 품을 받았다. 하지만 1965년 가장 먼저 주교직에 올랐다.

그 때 동기들이 그의 주교서품식장에서 "하느님 말씀 중에 틀린 말이 하나도 없어. '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'(마태 20, 16)라고 하셨잖아."라면서 한바탕 웃었던 기억이 새롭다.

동성학교에 진학해서도 사제 직에 확신을 갖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였다. 시간이 좀 흐르자 '꼭 신부가 돼야 하나?' 하는 회의가 '나 같은 사람도 신부가 될 수 있을까?'라는 의문으로 바뀌었지만 말이다.

그런 갈등 속에서도 공부는 그럭저럭 해 나가고, 주일이면 친구들과 어울려 북한산에 올라가 소리도 지르고 노래도 부르다 내려왔다.

2학년 때였다. 대구 집에서 방학을 보내고 올라왔는데 무슨 까닭인지 다른 때보다 의욕이 더 떨어졌다. 성유스티노 신학교 시절, 집에 가고 싶어 1원짜리 동전을 갖고 꾀를 부리다 실패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꾀병을 앓기로 마음먹었다.

담임 신부님이 아파서 누워 있는 학생에게 빵을 갖다 주는 장면도 여러 번 본 터라 이왕이면 빵도 얻어먹을 수 있는 꾀병이 좋을 것 같았다.

담임 신부님께 "머리가 몹시 아프다"고 거짓말을 하고 기숙사에 누웠다. 그런데 신부님은 정 못 참겠으면 집에 가서 휴양을 하고 오라는 말씀은커녕 이틀이 지나도 빵조차 갖다 주지 않으셨다. 밖에서 학생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도 한낮에 꾀병으로 누워 있는 '가짜환자'의 마음을 괴롭혔다. 이번에도 실패한 것 같았다.

다시 일어나서 공부해야 겠다고 마음을 고쳐 먹었는데 옆에 누워 있는 선배가 내 병세를 꼬치꼬치 캐묻더니 축농증이라는 진단을 내려 주었다.

축농증? 난생 처음 듣는 병명이지만 그럴듯한 병명을 하나쯤 대고 싶었던 터라 신부님께 가서 "저는 축농증에 걸렸습니다"라고 말씀 드렸다. 신부님은 "축농증이 무엇인지 아느냐?"고 무르시길 래 선배한테 주워들은 증상을 자세히 댔다.

곧바로 신부님이 소개해준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는데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. 진짜 축농증이었다. 그 바람에 수술까지 받고 한 학기를 쉬게 됐다. 같은 교정에서 공부하는 상급 반 동한 형에게는 혼이 날까 봐 신부되기 싫어 꾀병을 부렸다는 얘기를 차마 꺼내지 못했다.

3학년에 올라가서는 어느 정도 마음을 잡았다. 꾀병 때문에 뒤진 한 학기 공부를 만회하느라 책을 붙들고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자연스레 공부에 탄력이 붙었다. 그 전에는 도서관에서 주로 소설책을 뽑아 읽었다. 그런데 소설이라는 게 남녀가 만나서 사랑하다 헤어지고, 때로는 삼각관계에 빠지는 내용이 대부분이라 얼마 안 가 흥미를 잃었다.

반대로 처음에는 시큰둥했던 성인 전에서 새로운 재미를 찾았다. 사실 도서관에 더 이상 읽을 소설책이 없어 빼든 성인전이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가슴 속에서 뭔가 뜨거운 기운이 솟았다.

돈 보스코 성인과 소화 데레사 성녀 일대기를 그 때 읽었다. 특히 소화 데레사 성녀 일대기는 소설에서 느껴 보지 못한 뜨거운 감동을 안겨 주었다. 지금도 소화 데레사 성녀의 이 말씀을 기억한다.

"하느님은 미미한 존재를 통해서도 당신의 사랑을 충분히 드러내는 분입니다… 기쁨과 고통 등 모든 것이 사실은 하느님의 사랑에서 나옵니다…."

내게 심적 변화가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. 열심한 성인 얘기 일색이라고 쳐다보지도 않던 성인 전에서 영적 뜨거움을 느끼고, 모든 게 하느님 사랑으로 귀착되는 섭리에 조금씩 눈을 떠갔다. 한마디로 말해 하느님께 기울고 있었다.

신앙적 순수함 때문인지 3학년 때는 소위 '세심병(細心病)'이란 걸 앓았다. 죄 같지도 않은 죄까지 꼬치꼬치 고해 신부님께 고백해야 마음이 편한 결벽증 같은 증세말이다.

심지어 고해성사를 보고 나오는데 미처 말씀 드리지 못한 죄가 생각나서 다시 돌아가 "아까 ○○죄를 빠트렸습니다"라고 고백할 정도였다.

그같은 우스꽝스런 행동을 몇 번 되풀이하자 고해신부님이셨던 프랑스 출신의 공 신부님은 "너, 자꾸 그러면 신부가 될 수 없다"라고 타이르셨다.

세심병이 깊어지자 나 같이 부족한 사람은 다른 이들의 영혼을 구제하는 신부가 될 자격이 없다는 자격지심이 들었다. 사제 직에 대한 열망도 없이 어머니에게 등 떠밀려 신학교에 온 사람이 무슨 신부가 된단 말인가.

어느 날 심호흡을 크게 하고 공 신부님 방문을 두드렸다. 그리고 "이만 신학교에서 나가겠습니다."라고 정중히 말씀 드렸다. <계속>

[평화신문, 제726호(2003년 6월 1일),김원철 기자][편집 : 원 요아킴]



♣갈멜 수도회 수도자들의 삶을 노래한 / 故 최민순 신부님의 아름다운 詩♣

출처 : 한국 가톨릭 문화원
글쓴이 : 원요아킴 원글보기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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